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마바라의 난 (문단 편집) === 배경 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gakusyu.shizuoka-c.ed.jp/amakusa_image9.gif|width=100%]]}}}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www.h4.dion.ne.jp/Simabara.gif|width=100%]]}}}|| ---- 원래 시마바라는 키리시탄(キリシタン)[* [[크리스천]]을 [[일본어]] 발음으로 옮긴 것이다. 전국 시대나 에도 시대 초기의 일본인 기독교도들을 대개 이렇게 부른다.]이었던 아리마 [[가문#s-1|가문]]이 다스렸는데, 당시 영주인 아리마 나오즈미(有馬直純)가 [[노베오카]](延岡)로 전봉된 이후[* 아리마 나오즈미는 전봉된 후엔 [[가톨릭]]과 인연을 끊었고,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자 예전 영지의 농민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. 나오즈미가 가톨릭을 버리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면 나오즈미의 아버지인 [[아리마 하루노부]]가 포르투갈과 갈등을 겪는 와중에 사건을 무마해보려고 오카모토 다이하치(岡本大八)에게 뇌물을 줬다가 [[도쿠가와 이에야스]]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사형에 처해지고 [[가이에키]] 되었던 사건이 있었다. 나오즈미가 그나마 이에야스와의 친분으로 연좌를 면해서 겨우 영지를 상속받았으나, 이 과정에서 가톨릭과 가톨릭 신자들이 많은 자신의 영지에 대해 환멸을 느끼면서 스스로 전봉을 요청한 것이다.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'''[[예수회]] 사료에 1613년 나오즈미가 세례명을 받은 자신의 두 이복동생들을 8세와 6세일 때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.''' 그래서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자 [[복수귀]]마냥 예전 영지의 농민과 예전 가신들까지 때려잡게 된 것이다.] 마츠쿠라(松倉) 가문이 들어오면서 문제가 생겼다. 마츠쿠라 시게마사(松倉重政)는 키리시탄을 무지막지하게 탄압했고, 농민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린데다가 키리시탄의 본거지인 [[필리핀]]의 [[루손 섬]]을 공격하겠다면서 전쟁세까지 부과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. 또한 기존의 중심지였던 미나미시마바라시 지역의 히노에 성과 하라 성을 폐성시키고 시마바라시 지역에 [[시마바라 성|영지의 규모에 맞지 않는 거성]]을 지음으로써 영민들의 불만과 부담을 증가시켰다. 그리고 운젠 지옥(雲仙地獄) 고문[* [[운젠다케]](雲仙岳)에 있는 유황 온천에서 유래한 고문. 운젠다케는 과거부터 분화해왔고 1991년엔 화쇄류로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전적이 있는 활화산. 이 유황 온천은 화산 남부에 위치해 있다. 당시 마츠쿠라 가문 측은 그 펄펄 끓는 유황 온천에 키리시탄을 넣어 강제로 개종시켰고 이러한 잔인함에 [[가톨릭]]과 척을 지었던 [[개신교]] [[네덜란드인]]조차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.]이라 부르는 그 악명 높은 악행을 저질렀다. 그 아들인 마츠쿠라 카츠이에(松倉勝家)는 더한 [[막장]]으로, 아버지보다 더욱 심한 폭정을 일삼아[* 세금을 내지 못한 농민에게 도롱이를 풀지 못하게 입혀 놓고 불을 지르는 고문인 미노오도리(蓑踊り)가 이때 나왔다.] 농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시마바라의 난의 실마리를 제공했다. 이 외에도 아마쿠사라는 곳도 반란의 근원지였는데, 이 곳은 [[고니시 유키나가]]의 옛 영지로, 유키나가 자신이 가톨릭 신자[* [[세례명]]은 아우구스티노. 외손자 [[고니시 만쇼]]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.]였기 때문에 그곳도 [[가톨릭]]이 융성했다. 하지만 유키나가가 [[세키가하라 전투]] 이후 처형되고 그 뒤는 [[테라자와 히로타카]]가 지배하게 되었는데, 이 쪽도 만만치 않은 종교 박해를 자행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